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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베를 알자

교육학자 프뢰벨


프뢰벨은 교육학자이며 유치원의 창시자이다.
어린이들의 창조적이고 사회에 공헌하는 구성원이 되도록, 자신의 본질을
알기를 촉구하고, 그것을 위해 보편적이고 기초적인 교육을 받아야하며,
다면적인 교육을 통해 정서가 순화되고 다양성을 느낄 수 있고,
신체와 정신이 골고루 발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부모와 교사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과 가치 및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프뢰벨은 인간으로 성장해 가기 위한 가장 큰 능력이 자발성과 창조성이라고
강조하고, 어린이들이 마음껏 놀이를 통해 내면으로부터 발휘되고 점점
자라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프뢰벨은1782년 4월 21일 독일의 튀링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생후 9개월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 인해 외롭고,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10살인 1792년, 엄격한 아버지 대신 자상하고 인자한 외삼촌(호프만)이 프뢰벨의 양육과 교육을
책임지게 되면서, 사립학교에서 친구들과 마음껏 뛰놀며 자연을 탐색하고, 평화스러운 가정 생활 속에서 애정과 따뜻함이 충만한 날을 보냈다. 프뢰벨은 “아버지의 집은 엄격함이 지배하고, 외삼촌 댁은 선의와 부드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라고 했다.

15살인 1797년, 유명한 산림관인 비츠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산림관으로 갖추어야 할 임업, 기하학, 측량술 등을 배우고, 산과 들, 산림 속을 돌아다니며 식물을 채집하고 서재에서 풍부한 서적을
접하며 수학, 어학, 식물학 등에 몰두했다.

1799년, 임업실습 계약기간이 끝난 후, 예나대학 철학과에 입학하면서, 자연에 대한 신비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신학적 방향을 잡게되어, 후에 그의 철학관의 기초를 세우는 동기가 된다, 하지만 20세가 되던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학비를 내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와 삼림청 서기가 된다.

1805년, 외삼촌의 사망 후, 프뢰벨은 건축가가 되기위해 프랑크푸르트로가 페스탈로치의 제자인
그루너 박사를 만나게 되면서, 모범학교 교사가 되어 교사를 천직으로 삼게 되었고, 2년간
페스탈로치 (1746-1827, 근대 교육의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교육자로서의 인격에
크게 감명을 받아 교육자로서의 뜻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1813년, 큰형의 죽음으로, 조카들의 교육을 맡게 된 프뢰벨은 1817년 ‘일반 독일교육소’의 문을
열어 자신의 교육 사상을 실험하게 된다. 이듬해 카일하우로 학원을 옮겨, 이 곳에서 놀이
이론과 어린이 심리학을 연구하였고, 1826년 인간 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담아 대표적 저서인
‘인간교육’을 집필. 출간하였다.

1835년, ‘부르크도르프’ 고아원의 원장이 되어, 어린이들을 유아기부터 교육시킴으로써 올바르게
성장시킬수 있다고 생각한 프뢰벨은 4-5세 유아를 위한 예비학습과정을 설치하면서 유아교육에
실제적인 관심을 보인다.

1837년, 고향으로 돌아와 ‘자기 교수와 자기 학습으로 이끄는 직관교육’ 시설을 설립하여, 놀이
활동을 통한 유아의 본성에 따르는 교육을 주장하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이는 교육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뢰벨은 유아들에게
이상적인 놀잇감이나 작업 재료를 주어서 그것을 통해 창조력을 키우게 하고 인간으로서
전체적인 발달을 꾀하고자 했다.
‘자, 우리 어린이들과 함께 살아 보자!’라는 외침으로 모든 부모와 교육자에게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존중에 기초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 공동체 형성을 호소했으며, 놀이기구를 연구,
고안하여 가베(恩物)을 창안
하게 된다.

1839년, ‘유아교육 지도자 양성원’을 개설하고 놀이 작업소를 따로 만들었으며, 프뢰벨은 ‘작업’
이라는 것을 통하여 아이들의 신체와 감각 기관을 발달하게 하고, 사회적 정서 발달을 포함하여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눈뜨게 한다고 믿었다.

1840년, 세계 최초의 유치원 ‘Kindergarten(녹색이 짙은 어린이의 정원)’을 설립했으며, 모든
식물이 건강하게 성장하듯, 인생의 초기에,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유아는 자연과 신과
조화하면서, 돌봄을 받으며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1852년, 70세의 나이로 프뢰벨은 교육자로서 열정적인 일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