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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상식

“우리 아이 영재로” 부모 욕심에 창의력 멍든다

“우리 아이 영재로” 부모 욕심에 창의력 멍든다
한겨레 박창섭 기자
» 지나친 조기교육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영어 교육 시기는 더 빨라지고 있다. 지난 21일 서울 목동에서 어린아이들이 아침 일찍 영어유치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과열 바람’ 부는 영·유아 조기교육

“남들 다 하는데 안시킬 수 있나요” 태어난지 몇달 되지 않아 이제 몸을 겨우 뒤집는
아이에게 영어와 한글을 가르치고, 서너살만 돼도 수학·미술 등 너댓개 학원에 보내고…
 거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조기교육. 교육 전문가들은 발달단계를 무시한 조기교육의
 환상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사회적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김주미(34·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씨는 첫째가 생후 6개월이 되자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방문 교사를 불러 그림카드를 보여주거나 비디오를 틀어줬다. 임신 때부터
주변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들어온터라 주저없이 선택했다.
 3살 무렵엔 수학과 가베를 가르쳤고, 스포츠센터에 데려가 수영과 발레도 자신과 같이
 배우게 했다. 7살이 되자 바이올린과 피아노, 유리드믹스 학원에 등록했고 방문미술
교육도 시켰다. 현재 초등학교 2학년인 첫째 아이는 방과후 7개 학원을 전전하고 있다.

강진영(33·가명)씨 역시 생후 6개월부터 아이를 ‘짐보리’ 학원에 보냈다. 이어 방문
한글교육을 시켰고, 전문 영어 강사도 불렀다. 5살 땐 가베와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강씨는 피아노도 가르치고 싶었으나 아이의 손가락 힘이 약해 잠시 미뤄두고 있다.
 강씨는 “맞벌이라 시간을 낼 수 없어 몇가지밖에 못시키는데 주변 사람들 말 들으면
솔직히 당장이라도 회사 때려치우고 아이에 전념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 목동의 경우 영어유치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유아 대상
영어조기교육이 일반화됐다. 다섯 살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있는 김아무개(32서울
 양천구 목동)씨는 “한달에 100만원씩이나 주고 3살때부터 보내고 있다”며 “이 동네에선
 영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왕따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극단적 조기교육을 시키는 부모들은 대부분 “남들 다 하는데 우리 애만 안 시킬 수 없다”
고 말한다. 또 “어차피 배워야 할 거 빨리 배우면 좋지 않느냐”고 한다. 육아 관련
사이트에 가보면 ‘3살 때 꼭 배워야 할 것’ ‘영어 잘 가르치는 학원’ ‘최고 가베 교재
 리스트’ 등 조기교육을 자극하는 글들로 넘쳐난다.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이런 부모들의 경향은 잘 드러난다. 지난해 한 육아잡지가
자녀를 둔 주부 33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기교육 적기와 관련해
무려 66%가 생후 0~24개월이라고 답했다. 생후 25~36개월(25%), 생후 37~48개월(5%)
등의 답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조기교육을 왜 시키는지, 그래서 어떤 효과를 거뒀는지에 대해 부모들은 그럴듯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목표점도 없이 무작정 달리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남들 다 하는데” “배울 것 빨리 ”두세살부터 네댓개 ‘학원 순례’

조기교육의 시기가 갈수록 앞당겨지는 현상에 대해 교육 전문가들은 단순한 우려를 넘어
사회적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든 아이를 영재로 만들려고 하는
부모들의 욕심에 아이가 타고난 잠재 능력조차 제대로 개발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로 인해 미래의 우리 사회 생산성에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극단적 조기교육은 우선 아이가 태어나서 거쳐가게 되는 기본적인 발달 과정을 무시한다
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교육학의 거두인 피아제의 인지이론에 따르면 생후 1세
 이전에는 직접적 감각적 경험이 없이는 사고가 불가능하고, 2~3세부터 상상력이
가능해진다. 학령기에 이르러서야 집합개념 등의 논리적 사고력이 가능하며 만 10~11세
가 되어야 완전히 추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이는 아무리 주변에서 고난이도의 지적
 자극을 미리 주어도 아동은 일정한 수준의 발달 단계에 이르러서야 그 자극을 소화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연세대 의대 신의진 교수(정신과)는 “아동의 발달보다 훨씬 앞선 인지 자극이 조기에
주어졌을 때 과연 아이의 뇌 발달이 촉진될 것인지, 아니면 타고난 영재 지능을
개발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인지 아직 확답을 내릴 수 없지만, 과잉으로 아동의
 발달보다 훨씬 앞진 인지 자극이 주어지게 되면 그 시기에 적절히 발달해야 할 다른
인지 발달, 정서 발달, 사회성 발달 등의 영역이 제대로 발달할 기회가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아이 발달 단계 맞춘 적기교육
잠재력 살리고 호기심도 키워

아동기의 인지 특성에 따르면 아이들은 이 세상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고 이런 능력이 창의력과 연관이 되는데, 기존의 틀에 맞추는 암기
 위주의 조기교육은 아동의 이런 창의성을 감소시킬 위험도 높다. 서울대 의대 서유헌
교수(정신과)는 “최근의 뇌 발달 연구들을 보면 과잉조기교육에 의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면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라는 뇌의 부위가 줄어드는 등
 오히려 정상적인 뇌 발달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자녀가 아주 어린 나이에 글을 읽거나 수를 세면 부모는 천재가 아닌가 하고
 집중적으로 영재교육을 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길게 봤을 때 아이의 학습능력을
오히려 떨어뜨릴 수 있다. “이런 아동들은 뜻을 모르고 암기하는 경우가 많아 언어
 이해나 사회적 인지가 떨어져 발달의 불균형으로 인해 나이가 들수록 학습 능력이
 저조해질 가능성이 큰”(신의진 교수) 것이다.

이에 따라 교육 전문가들은 무지막지한 조기교육의 환상을 버리고 아이의 발달단계와
 적성에 맞는 적기교육이 정착돼야 한다고 주문한다. 한솔교육문화연구소 장유경
원장은 “무조건 빨리 가리치려하기보다는 지금 우리 아이에 이게 맞는지 전문가들에게
 물어서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동덕여대 우남희 교수
(아동학과)는 “대여섯 개 분야를 애가 다 잘할 수 있다고 보고 조기교육을 시키는 것은
 횡포와 다름 없다”며 “주변에 휩쓸려 따라가기 전에 아이가 어떤 분야에 관심을
 보이는지 시범적으로 해봤을 때 무리없이 재미있게 받아들이는지 등을 꼼꼼히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의 목표에 대해서 소신을 가질 필요도 있다. 가령 요즘 부모들은 자녀가 거의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기를 바라면서 영어 조기교육을 시키지만 실제 자녀가
컸을 때 그 정도의 영어 구사능력이 다 필요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서울대 이병민 교수(영어교육과)는 “우리나라는 싱가포르나 인도처럼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쓰는 나라가 아니며 앞으로도 영어가 한국어를 대체할 가능성은 없다”며
“그런데도 부모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욕심이자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영어 조기교육을 한다고 해서 투자한 막대한 비용과
 시간, 그리고 영어를 공부하느라 희생한 다른 부분을 따져보면 영어 조기교육의
효과는 기대만큼 크지 않다”고 덧붙였다.

서울교대 이완기 교수(영어교육과)는 “아동 교육에서 인간두뇌가 급속도로 발달하는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적절한 시점에 어떻게 배우느냐 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